“어떻게 하든 다가온 기회를 이용해야 한다. 나는 항상 그래왔다.”
시카고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레이 크록은 늘 더 나은 삶을 꿈꿔왔다.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아버지가 항상 적은 월급으로 집안을 꾸려가느라고 고민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때부터 돈을 벌기로 결심했다.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좋은 기회를 잡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크록은 재즈 피아니스트로 연예계에 뛰어들었다. 20세 때 결혼한 그는 음악계를 떠나 릴리-튤립 종이컵 회사의 세일즈맨으로 취업했으나 오래지 않아 세일즈맨 생활을 그만두고 시카고에 있는WGES라는 작은 라디오 방송국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거기서 그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음악을 고르고, 가수들을 섭외하고, 연주가들을 고용하는 일을 했다. (그는 샘과 헨리라고 하는 노래와 코메디를 같이 하는 팀을 발굴했는데 나중에 그들은 유명 연예인이 되었다.)
1년 반 동안 WGES에서 라디오 방송국 일을 하다가, 플로리다에서 부동산 일을 하기 위해 다시 자리를 옮겼다. 1920년 당시는 부동산 바람이 미국에 크게 불고 있었다. 그는 포트 로드데일의 늪지를 파는 부동산 회사에서 일했으나 1926년 말, 부동산 붐이 꺼지자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는 아내와 딸과 함께 시카고로 돌아갈 기차 삯을 벌기 위해 나이트클럽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몇 개월 후에야 그는 고물 자동차를 몰고 시카고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때를 잊지 못할 겁니다. 나는 완전히 알거지가 되었지요. 코트 한 벌도 없었고 장갑도 없었습니다. 시카고의 그 꽁꽁 얼어붙은 거리를 지나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완전히 동태였고, 내가 왜 그 길을 갔던가 후회했고, 빈털터리였습니다.”
한 가지 남은 것이 있다면, 언젠가는 성공한다는 꿈이었다. 그는 그 성공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어디서 이루어질지, 언제 이루어질지 알지 못했지만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확신처럼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꿈을 이루기 위한 기회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크록은 릴리-튤립사의 세일즈맨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성실히 근무해서 곧 중서부 지역의 판매책임자가 되었다. 35세가 되던 1937년, 우연히 한 번에 다섯 잔의 밀크쉐이크를 만들 수 있는 프린스 캐슬 멀티믹서라는 기계를 보았다. 그가 늘 자신에게 말한 것처럼 그건 기회였다. 그는 그 기회를 움켜쥐었다.
릴리-튤립사의 종이컵을 17년간이나 판매하고 판매조직의 사다리를 타고 정상까지 오르면서 그는 이제 자신의 사업을 펼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직장을 그만두었고 그 발명가와 계약을 맺어 곧 멀티믹서의 전 세계 독점판매권을 따냈다.
“안정되고 높은 급여를 주는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내는 충격을 받았고 내가 사표를 낸 사실에 쉽게 믿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미래 전부를 위험에 빠뜨렸어요. 당신은 지금 서른다섯 살이나 된 남자가 마치 스무 살인 것처럼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는 걸 알아요? 그 멀티믹서기가 지금 좋게 보이기는 해요. 그러나 그것이 실패한 사업으로 판명되면 그때는 어떻게 하지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내 직관을 믿어야 해. 이건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걸 나는 확신하고 있어.”
그 후 20년간 크록은 그 제품을 들고 전국의 잡화점과 음료수점과 우유판매점을 돌아다녔다. 그는 생활을 해나갈 정도의 수입을 올렸지만, 그건 그가 생각한 성공은 결코 아니었다.
크록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보람이 있는 고생이었다. 나는 그 경험을 아끼고 사랑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항상 다른 기회들을 엿보고 있었다. 나는 이 말을 항상 생각했다. ‘푸르름을 간직하는 한, 당신은 성장한다. 완벽하게 성숙했을 때 당신은 부패하기 시작한다.’”
1954년 캘리포니아 샌 버나디노의 햄버거 가게에 52세의, 결코 젊지 않은 세일즈맨이 찾아 왔다. 레이 크록이었다. 그 가게는 그의 멀티 믹서기를 다른 식당보다 많은 8대를 설치한 식당이었다. 그는 그 주인인 모리스 맥도날드와 리차드 맥도날드 형제가 오직 햄버거와 프렌치프라이와 밀크쉐이크만 판매하는 특이한 판매방식을 눈여겨보았다. 모든 것이 미리 준비되어 있었고, 모든 것이 규격화되어 있었다.
크록은 햄버거를 사먹으려고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경이로운 눈으로 보았다. 크록은 그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의 간편한 서비스와 청결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맥도날드 형제는 단돈 15센트에 규격화된 햄버거를 제공했고, 프렌치프라이는 뜨겁고 바삭했다.
“나는 그 시스템의 효율성과 단순성에 반했습니다. 그 한정된 메뉴를 생산해내는 각 단계는 최소의 노력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날 밤 모텔 방에서 나는 낮에 본 것을 깊이 생각했습니다. 전국에 퍼져 있는 맥도날드의 비전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각 가게에는 물론 8대의 멀티믹서가 가동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일정한 고정 수입이 끊임없이 내 주머니로 들어오는 꿈이었습니다.”
다음날, 크록은 맥도날드 형제에게 자신과 동업으로 맥도날드 식당을 여러 군데에서 열자고 제의했다. 그러면 자신의 멀티믹서 사업도 활성화될 것이었다. 그러나 맥도날드 형제는 현재에 만족한다고 대답하고 그 제안을 거절했다. 크록은 포기하지 않고 다른 지역에 자신이 맥도날드 식당을 열고 거기 멀티믹서기를 들여놓겠다는 제의를 다시 했다. 맥도날드 형제는 그 제의에 동의했다.
크록이 여는 식당은 맥도날드 식으로 운영되고 총수입의 0.5퍼센트를 맥도날드 형제에게 로열티로 주기로 합의했다. 1955년 크록은 맥도날드의 첫 번째 지점을 시카고의 데스 플레인에 열었다. 그의 나이 53세 때 일이었다.
그 해가 끝나갈 때 크록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맥도날드 총판권 두 군데를 더 팔았다. 크록은 맥도날드 사업을 향상시키기 위해 멀티믹서기의 권리를 팔았다. 진짜 이익은 멀티믹서기 기계가 아니라 햄버거 판매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1960년이 되자, 크록은 200개의 맥도날드 총판권을 판매했고 연 수익이 70만 달러에 달했다. 그는 맥도날드가 앞으로 훨씬 더 성장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부터 그는 모든 가맹점들은 임대로 할 것을 결심했다. 회사가 위치를 지정해주고, 레스토랑을 지어주고,장비를 제공해주고, 운영자에게 모든 걸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맥도날드는 가맹점 비용뿐만 아니라 임대비용까지도 받는 것이었다. 그것은 야심찬 계획이었지만 자본을 필요로 했다.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150만 달러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만한 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몇 군데 보험회사로부터 자금을 빌려야 했다. 거대한 사업 계획이었지만 만약 생각대로 사업이 안될 경우에는 재기불능의 파탄으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1961년 그는 맥도날드 형제로부터 심볼 마크와 권리, 음식 만드는 공식, 황금색 아취 심볼, 맥도날드라는 이름까지 모두 270만 달러에 샀다. 그리고 그 이후 맥도날드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속도로 무섭게 커나갔다. 1965년에 이르러 맥도날드 가게는 938개로 대폭 늘어났고 1억 7천만 달러의 판매고를 올렸다. 크록이 70세가 된 7년 후에는 100억 개 이상의 햄버걸를 팔아서 처음으로 10억 달러 이상의 매상을 올렸다.
나중에 크록은 빠른 서비스와 깨끗한 환경, 좋은 음식을 원하는 가족에게 합리적인 가격으로 음식을 제공하는 시장의 무한한 기회를 보았다고 말했다.
1995년에 맥도날드는 전 세계적으로 만 오천 개의 상점과 2백 3십억 달러가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크록은 이렇게 회상했다. “여러 해 동안 종이컵과 믹서기를 판매한 것이 내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정말로 원하는 직업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사람들은 내가 쉰두 살이 될 때까지 맥도날드 사업을 시작하지 않았고, 말 그대로 하룻밤 사이에 성공한 것에 깜짝 놀랍니다. 그러나 나는 한자리에 오랫동안 조용히 일하고 있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뛰어들어서 사업을 성장시킨 쇼비즈니스 사업자들처럼 늘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자고 일어났더니 성공했다는 말은 맞습니다.그러나 아침을 기다린 30년이라는 밤은 길고 길었습니다.”
“당신의 결심이 확고하다면 이루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그 결심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위험도 기꺼이 감수해야 합니다. 무모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미친 짓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어쩌면 당신은 파산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무언가를 진실로 굳게 믿는다면 당신은 무릎으로 기어서라도 그 목표에 닿아야 합니다. 어느 정도의 위험은 도전의 일부입니다. 그건 즐기는 것입니다.”
기회를 거머쥔 레이 크록 - 밀크쉐이크를 만드는 멀티믹서기를 세일즈하다 53세에 첫 맥도날드 체인점을 개설하다
출처: 갑부학당